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고 슈페를레 (문단 편집) === 전간기 ===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제국 워군 제 7군 소속 항공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이후 [[자유군단]]에 가입하였으나 자유군단이 자연스럽게 국가방위군에 포함되면서 계속 육군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1935년 [[독일 국방군]] [[루프트 바페|공군]]이 재창설되면서 공군으로 전군되었고 얼마가지 않아서 [[소장(계급)|소장]]까지 진급하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위시한 국가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콘도르 군단]]의 공군 최고 지휘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콘도르 군단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로는 나중에 같이 원수가 되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있었으며 슈페를레의 참모장으로써 폭격 전술을 전담하였었다. 슈페를레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을 콘도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슈페를레와 리히트호펜은 부하들에게 평판이 높았으며, 그 중에는 이후 2차 세계대전때 활약하게되는 공군 에이스 [[베르너 묄더스]]도 속해있었다. 슈페를레는 딱히 정치적으로 물들지는 않았으며, 그와 리히트호펜은 스페인 지도자들에게는 무뚝뚝하게 대했고 독일군의 [[스페인 내전]]의 지원 자체를 그렇게 찬성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스페인인들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권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콘도르 군단의 입장은 베를린에서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36년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하려고 한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전력의 20프로를 잃었다. 이 패배의 원인은 소련군 항공기인 [[I-15]]와 [[I-16]]이었다. 이후에도 [[스페인 공화국]]의 함대를 폭격하려고 하였지만 사전에 스페인 공화국의 함대는 폭격을 피하였고, 11월에는 마드리드를 폭격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하지만 슈페를레는 콘도르 군단의 사기를 유지하였으며 이후 콘도르 군단은 [[Bf 109]]와 같은 신식 전투기로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슈페를레는 공화국의 스파이를 검거하게 되었고, 공화국군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마을의 렌타리아 다리를 공격 대상으로 지정했지만 게르니카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게르니카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당시 참모장이었던 리히트호펜은 공화국군은 게르니카를 통해 후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슈페를레와 폭격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였으며, 게르니카의 남쪽과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공화당군을 포위하고 파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43대의 폭격기가 마을에 5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이것이 그 유명한 [[게르니카 폭격]]이다. 이에 대해서는 큰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폭격의 목적이 군인이어서 합법적이지만 이 폭격때문에 사망한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구호조치나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히트호펜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슈페를레 또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게르니카 폭격]]에 관여하였다. 이후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 슈페를레도 회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내용만 기소되었기 때문에 콘도르 군단에서의 행적은 처벌받지 않았다. 아무튼 이 [[게르니카 폭격]]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국민전선의 승리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슈페를레는 콘도르 군단에서의 전공으로 1937년 11월 1일,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 독일군 계급에서는 상급대장의 아래, 중장의 위에 해당하며, 미군 기준으로는 중장급에 해당함.]으로 진급한다. 하지만 이후, 빌헬름 파우펠과의 충돌로 히틀러는 빌헬름과 슈페를레를 모두 해임하였다. [[뮌헨 회담]]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 측 대표단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일부러 험상궂은 인상의 슈페를레 [[장군]]에게 이들을 대접케 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1일에는 스페인 내전 이후 슈페를레는 3 항공함대(Luftflotte 3)의 사령관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공군을 다른나라들을 위협하는데 사용하였다. 1938년 2월 12일 히틀러는 슈페를레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오스트리아 연방 총리 쿠르트 슈슈니그와 만나도록 초청했다. [[빌헬름 카이텔]], [[발터 폰 라이헤나우]]도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